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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통화하다가 ' 아빠는? ' 하니 ' 몰라! ' 하는 짧고 단호한 답이 돌아온다. 이건 십중팔구 아빠가 또 뭔가 엄마한테 짜증을 냈거나 둘이 싸웠거나 했을때의 반응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걱정하고 애닳아 했었는데 이젠 그러려니 한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고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이라서 익숙해졌나 보다.
아빠가 70세로 퇴직을 하신지 벌써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예전에 직장생활을 하실때는 입버릇처럼 얼른 퇴직하고 엄마랑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실꺼라 하더니 정작 퇴직후부터 한동안은 거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하셨다. 친구분들이 만나자고 전화가 와도 피곤하다며 거절하고 집에선 매일매일 엄마랑 다투고 짜증내고 하는통에 엄마의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었다. 핸드폰에 엄마나 아빠가 뜨면 한숨이 먼저 나올 정도였다.
뭔가 집중할만한 다른 것을 찾기 위해 텃밭가꾸기도 권했었고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헬스 회원권도 끊어서 선물하고 열받은 엄마도 동생이랑 교대로 매일매일 전화해서 위로하고 하느라 정말 진이 다 빠졌었다.
보통 직장을 퇴직하는 시기가 60세에서 65세 정도인데 아빠는 특수한 기술덕에 70세까지 직장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퇴직후를 정말 제대로 즐길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직장생활을 했던 기간이 너무 길어서였던건지 집에서 쉬는 것에 대한 적응을 더 힘들어 하는것 같았다.
고등학교때 한 친구아빠는 교육공무원이셨는데 뵐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이셨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하시던 분이셨다. 얼마전에 그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빠가 퇴직한 후의 생활에 아직 적응을 잘 못 하시는 것 같아 걱정이란 얘길 했는데 친구가 그랬다. 자기는 자기아빠가 그렇게 화를 많이 내고 짜증내는 분이라는걸 아빠가 퇴직하고 나서 알았다고 말이다. 매일매일 엄마랑 크고 작게 싸우시는데 자기는 그런 모습 생전 처음 봤었다며 몇년이 지나고 나서야 예전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왔다고 했다. 자기도 그랬지만 엄마가 무척 힘들어 하셨다면서 얘기해주는데 지금 우리 엄마랑 아빠가 보여주는 모습과 무척 비슷한 것 같았다.
나름대로 퇴직후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었는데 머리와 가슴은 같이 움직이지 않았나 보다.
아빠가 지난번에 그랬다.
이젠 아빠가 우리 가족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이다.
평생 쉬지않고 열심히 일해서 우리 가족 부족함 없이 지내왔고 자식들도 다 결혼해서 각자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뭔가를 더 해 줄 수 없다고 슬퍼하는 우리 아빠를 어떡하면 좋을까? 70세가 넘은 지금도 가장의
의무와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게 마음 아프다.
엄마랑 아빠랑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두 분 사이좋게 지내시는게 나랑 동생을 위한 제일 큰 선물이라고 얘기했는데 알겠다고 얘기하면서도 별로 가슴으로 공감하는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아빠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 켠이 무겁다. 하루라도 빨리 아빠가 그 무기력과 우울함에서 빠져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빨리 아빠가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나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